성장주의 시대에는 모두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 달려갔기 때문에 불평등, 사회정의, 빈곤 등이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탈성장 담론은 90년대 자발적 가난, 빈그릇 운동, 무소유 등으로 나타났지만, 고귀하고 품위 있는 소수의 전유물로 오해되어 왔다. 탈성장 시대는 이제 모두가 가난해지는 시대로 천천히 향하는 것에 전환사회의 열쇠가 있다. 더불어 가난의 시대는 오히려 관계의 풍요 속에서 서로 가난을 공유하고 나누려 할 때 찾아오는 탈성장 전환사회를 의미한다. 우리는 빈곤을 없애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겠지만, 더불어 가난을 우리의 전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알듯말듯한...
이해가 쉽지 않았던 내용들
조금 알 것 같기도 한데,
무슨말인지 잘 이해가 안되었던 것은
그동안 받은 교육이나 여러가지 정보와는 너무 다른 개념들이어서 다시 곱씹어도 눈에 익숙하게 들어오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머리속에서도 빙빙 돌다가 마침내는 튕겨져 나간 것 같은 그런 내용들.
그렇지만 지독히도 모든 것은 연결되어있다는 것만이
여러가지 책을 읽고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할수록 와닿습니다.
가난의 서재
탈성장 시대 삶의 전환
목차
1장 가난의 사색 - 자발적 가난, 무소유, 빈그릇 운동
- 선택한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 -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행복
- 나락 한 알에도 우주가 깃들어 있다 -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 내 안의 진리 실험을 위한 가난과 겸손 - 간디자서전
- 아무것도 갖지 않은 자들의 영성적 공동체 -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 도제조합 속에서 기하학적 관계망을 탐색하다 - 에티카
2장 탈성장의 모색 - 관계의 빈곤이 아닌 더불어 가난으로
- 무소유가 죽음이 아니듯, 탈성장도 종말이 아니다 - 탈성장 개념어 사전
- 고독한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넘어 더불어 가난으로 - 도넛경제학
- 최악의 붕괴 상황에 사회 재건에 나서자 - 붕괴의 다섯 단계
- 국가주의와 성장 이데올로기의 유혹 -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 금융자본주의가 호출하는 주체성으로부터 벗어나자! - 부채인간
3장 협동의 탐색 - 결여와 빈곤에서 증여와 호혜의 연대로
- 선물처럼 주고받을 수 있는 가난 - 증여론
- 가난의 경제는 사랑의 경제를 필요로 한다 -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 빈곤에 맞선 공공공 사회 건설 - 거대한 전환
- 정직한 노력은 협동에 있다 - 깨어나라! 협동조합
4장 자유의 문화 - 가난하지만 자유정신을 잃지 말자!
- 관직의 망상을 버리고, 뜻대로 가라 - 이탁오평전
- 감옥 속 민들레에도 생명의 위대함이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자발적 가난, 자유로운 삶의 시작 - 자발적 가난
- 시골에 가니 희망이 있었다 - 조화로운 삶
지금의 삶에서 더 가난해지도록 자신에 대해서 더 까다롭고 더 불편해져야 한다. 그것은 깐깐하고, 불편하고, 의식적인 삶이며, 무심결에 살던 성장주의 문명과는 궤도를 달리한다. 다시 말해 탈성장은 더불어 가난해지고, 더 불편해지고, 덜 쓰고, 덜 누리고 사는 삶을 의미한다. 그것이 자연과 사람이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무소유가 죽음이 아니듯, 탈성장도 종말이 아니다."
랏자라토의 '부채인간'은 부채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빚을 진다는 것은 그저 돈을 빌려 쓰는 등가 교환의 입장에 서는 게 아니라, 채권자 채무자의 권력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미래 가능성을 차압하여 현재에 쓰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미래의 시간을 미리 당겨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빚을 지면 가난은 개인이 책임져야 할 궁핍과 빈곤이 된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이자와 원금 회수의 시간은 자신의 삶을 옥죄고 실존적인 위기로 치달아가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을 권하는 사회가 바로 금융자본주의 형태로 버젓이 성행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빚이 자신의 능력이라도 되는 듯한 착각이 비탄과 궁핍, 실존적 위기로 뒤바뀌는 것은 시간 문제다. 자신이 갖고 있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가능성들은 모두 다 금융 질서 스케쥴에 맞추어지게 되고, 이에 따라 개인이 직면하게 되는 선택지와 가능성의 축소 역시도 함께 말할 수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빚을 진다는 것은, 부채를 통해서 현재의 부족과 결핍을 해결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그러나 연대와 협동, 협력의 과정에 의지하기보다는 빚과 금융에 호소하는 것은 결국 관계의 풍요로움과 다채로움이 갖고 있는 가능성을 잠식한다. 문제는 신용과 신뢰 관계라고 얘기되는 채무자와 채권자 관계로 공동체적 관계망들이 재편되는 데 있다. 이에 따라 이웃과 친구, 동료 등에게 채무-채권 관계가 작동하게 되면, 기존에 갖고 있는 관계의 가능성과 잠재성의 여지도 잠식되어 버린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은행, 금융권 등에서만 빚의 관계를 맺으려고 하고 보다 자신의 실존과 관련이 없는 위생적이고 탈색된 행정적인 관계에서 채무-채권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자신이 신용과 신뢰를 입증해야 하며, 자신의 채무 변재 능력, 사회적 신뢰도, 신용에 동반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측면까지도 점검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부채는 끊임없는 자기 관리와 자기 통치, 자기 계발 속에 개인을 던져 놓는다. 즉, 철저히 공공 영역의 책임과 사회적 안전망을 개인 책임으로 돌리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등장한다. 결국 공동체적 관계망이 갖고 있는 책임, 윤리, 규범 등이 아니라, 개인이 갖고 있는 책임, 윤리 의식, 도덕감에 기반한 게 금융자본주의다.
"그리스는 유럽의 열등생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리스의 장점이다. 다행히도, 복합성을 갖고 있는 그리스와 같은 열등생들이 존재한다. 이 열등생들은 독일과 프랑스의 이른바 '정상화' 계획을 거부한다. 그리스가 계속해서 불량 학생으로 남아 있기를, 그리고 우리가 좋은 친구들로 남아 있기를..."
빈곤과 가난은 다르다.
기성 세대가 자발적 가난을 말하는 것은 너무도 위선적인 행동이라고 규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탈성장 시대를 살면서 수동적으로 가난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가난을 맞이하는 준비 동작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그러나 반발이 너무 커서 더이상 얘기할 수 없었다. 사실 청년 세대가 겪고 있는 곤궁함의 영역은 가난이 아니라, 빈곤의 영역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모든 제도와 정책, 프로그램 등이 집중해야 하는 것도 맞는 이야기이다. 빈곤은 외롭게 혼자 있는 개인들에게 엄습한다. 그래서 빈곤에 직면한 사람들은 순식간에 자신의 자존감과 자립의지 등을 놓치게 되는수가 많다. 빈곤은 부족, 결핍, 결여, 필요라는 개념에 따라 조성된 삶의 형태이다. 반면 가난은 오히려 관계의 풍요와 자립과 자족의 삼에 깃드는 향기와 풍취가 있는 삶의 방식이다. 자존감을 버리고 나약한 인간이 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의 자조, 자립, 자치의 기반 위에서 오히려 낮은 곳으로 향하게 된다. 가난을 얘기하면 웬 지적 사치를 누리려고 하느냐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가난은 빈곤에 가깝다. 빈곤은 개인을 괴롭히지만, 가난은 개인을 풍부하게 만들고 새로운 충만한 삶의 양식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빈곤을 최대한 극복하고 자발적 가난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가난"
이렇게 말하기는 그렇지만,
엄청나게 부유하지도 않지만, 한번도 가난해보지는 않은 사람으로서,
자발적 가난이라는 것을 어떻게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맞이할 수 있는지 상상이 잘 되지 않습니다.
또한,
철저하게 자본주의 사회의 문법대로 살아왔고
또한 그것이 운이 좋게 먹혔던 사람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문법은 몸에 밴 듯 이해가 되는데,
자발적 가난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해야 몸에 두를수라도 있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행자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
미니멀리즘은 늘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태도를 취한다.
꼭 필요하다고 고집스럽게 챙겨간 사물이나 물건 등은 오히려 짐이 된다. 훌훌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머무는 자리에는 굳이 필요로 포장된 사물이나 가재도구, 생활소품 등이 복잡하게 배열될 필요가 없다. 인생은 여행의 여정과도 같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행로이다. 그러나 떠날 준비가 된 사람이야말로 그가 머문 자리의 촉지적인 감수성과 둘레 환경의 재발견, 사물과 삶의 재발견 등이 비로소 가능한 사람이다. 잠깐 동안 머물다 헤어질 존재들이기에, 너무도 마음 깊이 간직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느낄 수 있다.
가난의 삶, 채식주의 선언
가난의 삶, 그것은 채식인으로서의 삶의 시작이다. 채식은 지구에게, 생명에게, 자연에게 더이상 하중과 책임을 지우지 않겠다는 용기 있는 행동의 시작이다. 이를테면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육식의 폐해가 기후 위기에 대한 책임은 25% 정도 산정되고 있는 상황이다. 육식은 9~22인분의 식사를 혼자 독차지하는 효과를 갖는다. 가난하고 소박한 밥상은 생명과의 약속이자 3세계 민중과의 약속이다.
더불어 가난의 삶, 조화로운 삶에 대해 니어링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해마다 그해에 필요한 양식을 생각해 밭에 심을 곡식의 양을 결정하듯이, 우리는 반드시 필요한 현금에 맞추어 돈을 벌려고 했다. 필요한 것이 마련되었다고 판단되면, 그해의 남은 시간 동안에는 더이상 농사를 짓지 않았고, 돈을 더 벌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먹고 사는 것만 해결하고자 했으며, 이렇게 일단 기본 생활 수단이 마련되면 다른 일들에 관심을 돌려 열중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진 것은 사회 활동, 그리고 독서와 글쓰기와 작곡 같은 취미 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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